대담한, 웬디 셔먼
<분석과전망>한일관계에 대한 방향과 정책기조, 확고히 잡아주다.
“정치지도자가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같은 도발은 진전이 아니라 마비를 초래한다”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이 지난달 27일(현지시각)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주최 세미나 기조연설에서 한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한미관계를 잘 아는 사람일수록 그 놀라움은 컸다. 셔먼 차관의 발언은 일본과 갈등을 빚고 있는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까지도 싸잡아서 비판한 것이었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역사를 미화한 것은 기본이었다.
셔먼의 그 발언이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은 2일이었다. 전날 박근혜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과거사와 관련해서 일본의 진정한 반성과 사과가 있을 때 한일관계가 발전할 수 있다“라는 말을 했었다.
새누리당 김을동 최고위원이 2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박대통령의 삼일절 기념사에 미국이 찬물을 끼얹었다고 역정을 냈던 이유다.
김 위원은 셔먼 차관의 그 발언에 대해 한중일 사이에서 갈등을 빚고 있는 과거사 문제를 놓고 과거사를 덮자는 취지의 발언이라고 했다. "미국이 유럽에 가서 나치를 용서하고 유럽 모두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반문하고 싶다"는 말을 하면서다.
많은 사람들이 김 위원에게 동의를 표했다.
새정치민주연합 김영록 수석대변인도 현안브리핑을 통해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의 발언은 동북아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 없이 이루어진 발언"이라며 유감을 표명했다.
그렇지만 김 대변인의 브리핑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웃거나 슬퍼했다. 김 대변인이 셔먼 차관이 ‘동북아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정례브리핑을 통해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빌 클린턴 행정부 말기 대북정책조정관이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과 조명록 북한군 차수의 교차방문을 성사시킨 인사가 다름 아닌 그녀였다. 2005년 '북미공동코뮈니케'를 도출했던 주역이기도 했다.
행정부에서 정무 차관이기는 하지만 정기적으로 북핵 동향 보고를 받는 등 북한 문제를 꼼꼼히 챙기고 있을 정도로 그녀는 한반도 문제에 정통한 동북아 전문가인 것이다.
셔먼 차관의 발언은 김 대변인의 지적처럼 모르고 한 실수가 아니다.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이 셔먼 차관의 발언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얼마나 미국에 얕잡아 보인다고 그럴까“라며 화를 냈다. 정 전 장관은 3일 SBS라디오 '한수진의 SBS전망대'와의 인터뷰에서 "참 기가 막힌 일이다. 우리나라 외교의 위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라며 분개를 했다.
셔먼 차관의 발언은 극히 고도의 정치력 발휘다.
한미일3각군사동맹 구축을 위한 대담한 행보인 것이다. 현 시기 한미일3각군사동맹 구축에서 현안은 풀리지 않고 있는 한일관계 문제이다. 미국에게 어떻게 해서든 한일관계를 풀어야만 한미일3각군사동맹구축 사업에 성과가 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정부에게 ‘과거의 일본을 잊으라’고 주문을 하고 있는 것이 셔먼 차관 발언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이다.
정 전 장관의 문제의식도 여기에 일치한다. 정 전 장관은 방송에서 ‘미국이 한국, 일본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서 이른바 반중 통일전선을 꾸려야하는데 한국이 과거사 문제로 일본과 대화도 안 하려고 하니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셔먼이 이렇게 작심을 하고, 민족주의 감정을 이용해서 대외 정치적인 지지받으려고 하지 마라, 이런 식으로 치고 나왔다’는 식의 분석을 내놓은 것이다.
셔먼 차관의 발언을 대담한 것으로 평가하고 그 대담함에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야했던 결정적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와 관련 새정치민주연합의 신경민 의원도 의미심장한 언급을 한다. 한반도 문제에 정통한 셔먼 차관의 이번 공개 발언에 대해 언론을 통해 "워싱턴 씽크탱크 내 일반적인 정서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지적을 한 것이다.
신 의원의 지적은 셔먼 차관의 발언에 대한 미 국무부 입장과도 일맥상통한다.
마리 하프 국무부 부대변인은 2일 정례브리핑을 통해 "(셔먼 차관의 발언은) 미국 정책의 어떠한 변화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언급은 어떤 식으로든 미국 정책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는다"라고 선을 그었다.
선명한 선이었다. 셔먼 차관의 발언은 수 많은 의미를 갖는 중요한 말이었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라고 너무나도 단호하게 딱, 잡아 뗀 것이었다.
그러나 그를 두고 미국이 억지를 부린다고 볼 사람은 없다. 대담한 정치력 발휘의 범주로 평가를 하는 것이다.
그렇듯, ‘정치지도자는 과거의 적을 비난하지 말라’는 셔먼 차관의 말은 미국에게서는 옳은 것이다. 힘이 작동하는 국제사회의 현실이 그렇다.
조태용 외교부 차관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것도 그것이다. 조 차관이 2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 출석해 ‘셔먼 차관 발언에 대해서 외교부도 가볍게 보고 있지 않다’고 의견표명을 하면서도 '미국 정부에서는 과거 역사에 대해 그동안 밝혀왔던 입장에서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1차적 확인은 했다고 문제 삼지 않는 태도를 보여준 것이다.
박대통령은 심기가 불편할 것이다. 3.1절 기념연설과 그 이틀 전에 있었던 셔먼 차관의 주장이 서로 엇나가고 있는 것에 대한 정치적 부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말이 없다.
셔먼 차관이 대담하게 잡아주는 한일관계의 방향과 기조에 대해 박 대통령은 어떻게 처신을 하게 될 것인가?
아무도 단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 결과를 잘 알기 때문이다. 한미동맹으로도 혹은 ‘빛 샐 틈 없는 한미공조’로도 설명될 수 없는 특별한 내용이 작동할 때만이 가져오게 되는 결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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