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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과 전망

아! 성묘

by 전선에서 2014. 8. 25.

<단상>좋아지는 북일관계에 따라 일본 유족들의 북한행 성묘 결정을 보며


 


오늘 오전에 벌초를 했어

형님은 지나가는 듯하게 자연스럽게 그렇게 말을 했다. 두어달만에 전화를 한 것이 무엇때문이란 것을 알았을 형님이었다. 말 도중에, 이번에는 오니? 하는 말을 또 자연스럽게 끼워넣을 것이 번했다. 추석을 열흘 앞두고 맞이하게 되는 아버지의 제사였다.

죄송합니다

형님은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잠시간의 어색한 침묵을 깨뜨리고 나온 형님의 말은 그러나 결정적인 것이었다.

아버지가 안계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겠니

이번에는 내가 말을 잇지 못했다.

일본 사람들 성묘 간다는 얘기 못 들었어?”

?”
북한에 말야


갑작스럽게 화제를 바꾸는 형님 말에서 난 내가 최근 일본유족들이 북한에 성묘를 가는 내용을 페북에 올린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천륜에 대한 것을 종자로 쓴 글이었다. 이념이고 뭐고 그것이 의미가 있으려면 사람이 우선이라는 것을 그 짧은 글에서 난 강조했던 것이다. <미국의 소리>방송에서 보도한 것을 인용한 글이었다. 페북이니만큼 정치적 내용은 일부러 피하고 쓴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북한에서 사망한 일본인 유족들의 북한행 성묘였다. 보도에 따르면 일본의 민간단체인 조선 북부지역에 남겨진 일본인 유골의 수용과 성묘를 요구하는 유족 연락회가 다음달 15일에서 23일까지의 일정으로 유족들이 북한을 방문한다고 했다. 지난 22일이었다.


어떻게 보든 부러운 일이었다. 우리정부가 북한에 이산가족상봉문제를 포함하는 여러 의제를 다루자며 2차남북고위급회담을 제의했을 때 환호하는 사람은 사실, 별 없었다.

미국이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와 함께 한미합동군사훈련인 을지프리덤(UFG)를 강행하는 조건에서 북한이 이를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세 살 먹은 아이들도 알만한 것이었다. 북한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한 제의를 하는 우리나라의 정치에서 사람들은 이를테면 술수같은 것을 읽어냈다. 남북이산가족상봉 문제를 그 무슨 이벤트처럼 접근하는 관점도 문제이지만 위기에 빠진 자신의 상황에서 빠져나가려는 처럼 보았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인 유족들이 북한에 성묘를 간다는 것은 부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처음이 아닌데도 그랬다. 지난 2012년 북한이 일본인들에 대한 성묘 방북을 허용한 이후 지금까지 8차례나 성사되었던 방북이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일본인 유족들의 방북은 6월과 7월이었다. 길게도 10일간의 일정이었다. 유가족은 9명이었다. 그때 그들은 북한에 머물며 함흥에 있는 일본인 매장지 등을 방문했다. 일본 취재진도 동행을 했다. 30여명이었다. 유가족 보다 3배가 더 많은 수였다. 대북제재 완화 조치 이후 처음 이뤄진 방북 활동에 얼마나 뜨거운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지를 반영하는 풍경이었다.


유족들을 둘러싸고 취재경쟁을 벌이는 취재진들에게서 사람들이 한결 같이 읽었던 것은 취재열기 만큼이나 달아올라 안정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북일관계의 진전이었다.

이번 일본유족들의 성묘방북 결정 보도에서 특히 눈이 가는 것은 일본인 유족 연락회가 성묘차 방북하겠다는 뜻을 일본 정부에 요청했을 때 양측의 승인을 받아냈다는 대목이었다. ‘승인을 받아냈다는 문장에서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민간단체들이 온갖 준비를 다 갖추어 통일부에 방북을 신청하게 되면 통일부가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리고 마는 뉴스를 오버랩시켰다.


니글 잘 보고 있다. 많은 품을 들이고 점점 쉽게도 씌여지는 것 같아 좋기는 하더라. 다 인정한다

형님은 작정한 듯이 말을 이어갔다.

그렇지만 말이야

형님의 말은 점점 단호해져갔다. 아무래도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촛불 드느라 바쁘고 분석기사 쓰는 것 땜에 짬이 안난다하더라도 이건 아냐!

나는 한동안 듣고만 있어야 했다.

남북관계나 북미관계 특히 최근 들어 북일관계에 대한 글이 짧고 그래서 좋다는 말을 이어가는 형님 말을 좆아가면서 난 낭패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덜 떨어진 인간. 그런 생각이었다.

천륜을 앞세워 원칙적으로 나오는 형님 앞에서 나의 온몸은 이미 부끄러움에 휩싸이고 있었다. 내가 마련할 수 있는 출로는 한가지 밖에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형님! 내려가겠습니다

난 급기야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형님은 예의 그 부드러운 어투로, 조심해서 내려와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나는 곧바로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10만원만 주라

?”

묻지마!”

저번에 것은 언제 갚을 건데

저번에 말했쟎아. 이명박각하께서 살고 계시는 논현동에 내가 갖고 있는 9층짜리 빌딩이 팔리면 갚아준다고 말야

나두 저번에 말했쟎아. 그 빌딩 북미대결전이 끝나기 전에는 안 팔린다고
빌려줄 거야 말 거야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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