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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권말선/그이의 환한 미소(두번째 시집)

[시] 풍명실업고등학교

by 전선에서 2014. 3. 19.

풍명실업고등학교


                                    권말선


가난해서, 너무나 가난해서
주경야독 하던 시절

낮에는 수출용 양복 만드느라
밴딩나이프에 손가락 베어도 보고
화장실 변기에 앉아 하염없이 졸다
화장실 자주 간다고 핀잔도 듣고
졸면서 가위질하다 분임언니에게
등짝을 맞았던가 욕 먹었던가
그래도 재밌었지 친구도 많았고
첫사랑 편지, 면회 기다리는 설레임
작업시간 내내 졸지말고 열심히 일하라
최신가요 빵빵 틀어주면 신나서 흥얼흥얼

가끔 받는 시골 계신 아버지 편지
눈물나게 가슴 쓰려 달려가고팠던 적
고생스런 엄마의 한숨소리 귓전에 들려
고개 파묻고 엉엉 울고팠던 적
그리운 친구 만나러 기차역 가는 상상
그러느라 맘 어설픈 날도 많았었지만

돌아보면 학창시절 함께 웃던
친구들 얼굴 참말로 그리워
시골초등학교 분교도 아닌데
우리같은 애어린 산업역군이
더이상 없다는 건 다행이지만
일반학교로 바뀌지도 못하고
그만 사라져버린 우리들 모교

야근하는 친구 공부 숙제 챙겨주고
수업끝나면 우리를 반겨 준
떡볶이 순대 튀김 포장마차에서
웃음꽃 피우며 허기진 우정 달래던,
꽃피는 봄이면 나비떼들마냥
꽃무더기 옮겨 다니며 사진 찍고
사감님 눈 피해 우르르 모여 수다떨기,
소개팅, 펜팔, 첫사랑에 가슴 들떴던
우리들도 싱그런 여고생이었는데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부끄러워서 남자친구에게도
사회친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는
친구의 고백 가슴 아프고 슬펐어
배움이 짧았던 아쉬움은 크지만
삼년 혹은 그 이상을 어린 우리
돈 벌며 공부하며 열심히 살았는데
그게 부끄러운 건 아니건만......

풍명실업고등학교 그리운 옛 친구들
지금도 자기 자리에서 그때처럼
다들 힘차게 살아가고 있겠지
더이상 부끄러워 하지 않고
이제는 아이에게 당당히 말하겠지
엄마는 어린 나이에 혼자서
학교도 다니고 열심히 일도 했다고
명문고를 다닌 건 아니었지만
우리 자신이 이미 걸작이었다고
그래서 너같은 멋진 애를 낳은거라고
아이 손 잡고 그 때처럼 싱그런 웃음
마음껏 웃고 있기를...

 

           (2012-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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