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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권말선/그이의 환한 미소(두번째 시집)

흡혈의 역사책을 걷어치워라

by 전선에서 2015. 11. 2.

흡혈의 역사책을 걷어치워라


                                              


                        권말선








아서라, 그런 책 

내밀지 마라



책장을 열면

썩어가던 관두껑도 같이 열리고

군화발 떨그럭대며

함부로 총질해대던

검은 안경 쓴 망령도 되살아나겠지



살아생전 

독립군 때려잡고

일제에 빌붙어

미제에 빌붙어

권력을 쥐고 흔들며

사람 피 빨던 흡혈귀 아니더냐



친일은 정당했다며

수탈 아닌 수출이었다며

위안부는 자진해서 돈벌이했다며

일본과 미국을 우러르자며

영원히 분단으로 살자며

뇌를 좀먹을

영혼을 좀먹을

사악한 책 아니더냐



아서라, 저리 치워라 

피칠한 아비의 유령을 깨워

음습한 지옥의 문을 여는

저 흡혈의 책을 내밀지만

피로 얼룩진 더러운 손으로

제 얼굴을 닦는 것일 뿐

그런다고 깨끗해진다더냐

더러운 너희 죄가 씻긴다더냐



우리는 우리 책을 쓰련다

군화발에 질려 

옴짝달싹 못 하고

돌 틈에 

꽃무덤 아래

고목의 뿌리 속에 숨죽인

그 이름과 그 사연과 그 한을 

모두 다 깨우련다

우리의 역사 마디마디에 써 넣으련다



반 만 년 선명한 자부심 앞에

친일독재매국의 부끄러운 중얼거림일랑

아서라, 저리 걷어치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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