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혈의 역사책을 걷어치워라
권말선
아서라, 그런 책
내밀지 마라
책장을 열면
썩어가던 관두껑도 같이 열리고
군화발 떨그럭대며
함부로 총질해대던
검은 안경 쓴 망령도 되살아나겠지
살아생전
독립군 때려잡고
일제에 빌붙어
미제에 빌붙어
권력을 쥐고 흔들며
사람 피 빨던 흡혈귀 아니더냐
친일은 정당했다며
수탈 아닌 수출이었다며
위안부는 자진해서 돈벌이했다며
일본과 미국을 우러르자며
영원히 분단으로 살자며
뇌를 좀먹을
영혼을 좀먹을
사악한 책 아니더냐
아서라, 저리 치워라
피칠한 아비의 유령을 깨워
음습한 지옥의 문을 여는
저 흡혈의 책을 내밀지만
피로 얼룩진 더러운 손으로
제 얼굴을 닦는 것일 뿐
그런다고 깨끗해진다더냐
더러운 너희 죄가 씻긴다더냐
우리는 우리 책을 쓰련다
군화발에 질려
옴짝달싹 못 하고
돌 틈에
꽃무덤 아래
고목의 뿌리 속에 숨죽인
그 이름과 그 사연과 그 한을
모두 다 깨우련다
우리의 역사 마디마디에 써 넣으련다
반 만 년 선명한 자부심 앞에
친일독재매국의 부끄러운 중얼거림일랑
아서라, 저리 걷어치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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