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주통일연구소
  • 자주통일연구소
분석과 전망

홍용표 장관의 '슬픔'

by 전선에서 2015. 8. 6.

홍용표 장관의 '슬픔'

<분석과전망>남북신뢰는 간 데 없고 대북대결만 판을 치는 권력지형


자주통일연구소 한성 






홍용표 통일부장관의 슬픔과 좌절은 얼마나 클 것인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가 방북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이 여사 손에 정부의 대북메시지가 들려져 있지 않은 것과 관련해 몇몇 전문가들이 하고 있는 일종의 탄식이다

이 여사의 방북이 남북관계 개선의 물꼬를 틀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지만 청와대의 의도 때문에 개인적 차원의 방북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고 말았다는 의미다.

 

남북대화가 남북관계 개선뿐만 아니라 동북아정치지형의 변화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홍 장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 할 것 없이 하고 있을 법한 탄식이다.

 

올 상반기 말 홍 장관은 남북관계 개선의 물꼬를 트겠다는 정책 하나를 내놓는다. 5월이었다. 정부당국의 남북민간교류확대 방침이었다.

 

지자체는 물론 민간통일운동단체 등 많은 곳이 적잖은 기대를 가졌다. 그럴 것이 이명박 정부 들어서고 5.24대북제재조치가 발표되고 난 뒤 얼어붙어있었던 남북관계가 7여년 만에 개선의 계기를 맞게 될 지도 모른다는 바램들이 곳곳에서 일었던 것이다.

특히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신년사를 통해 남북 간 최고위급회담을 언급을 했었고 이에 대해 박근혜대통령도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다는 것이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기대는 오래가지 못하고 사그러들고 말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거세찬 반북공세 때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예의 그, 북핵 폐기를 들고 나왔다. 북한의 국가발전전략인 핵경제병진노선이 성공할 수 없다는 주장도 했다. 대북인권공세가 그 뒤를 따랐다.

박대통령은 이어 북한 현영철인민무력부장 고사총 총살설 첩보를 이용해 북한의 이른바 공포정치라는 개념을 만들어 확산시키기도 했다. 평양에 대한 적극적인 자극이었다.

 

결국, 지자체가 잔뜩 준비하고 있었던 남북교류사업은 시도조차 되지 못했다. 6.15공동선언 15주년을 맞이해 민간통일운동진영이 활발하게 시도했던 민간통일운동진영의 6.15민족공동행사도 무산되고 말았다.


당연한 귀결이었다, 정치적으로 반북공세가 이루어지고 있는 조건에서 민간진영의 남북교류가 성사된다는 것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이때 홍 장관이 경험했을 것은 좌절감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홍 장관은 이에 굴하지 않은 듯 했다.


8.15광복절 70주년을 앞두고 또 다시 8.15민족공동행사 추진에 의욕을 보였다. 서울과 평양에 남과 북의 대표단이 동시에 참가하는 교차참가를 추진했던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의 방북이 준비되고 있는 것도 남북관계 개선에 중요한 흐름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의욕 역시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리고 만다. 미국이 7월 말, 8월 중순 미국이 한미연합군사훈련인 을지프리덤가디언을 하기로 발표를 한 것이다.


미국의 그 조처는 남북관계 개선의 여지 즉 남북대화의 여지를 완벽한 수준에서 송두리째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8.15민족공동행사는 무산될 것을 이 희호여사의 방북은 단순 방북으로 되고 말 것을 강제하는 결정적 정세흐름이었던 것이다.

 

홍 장관이 또 다시 맞닥뜨려야했을 깊은 좌절감

사실, 회복불가능해 보이는 좌절감이다. 남북관계 사업 전반을 책임지고 있는 주무 장관으로서 남북관계 개선에 성과를 내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홍 장관은 대통령의 반북공세 앞에서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미국의 한미연합군사훈련 앞에서 부질없이 변죽만 울리다 만 셈이었던 것이다.



홍 장관은 지금 과거를 떠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홍 장관이 '18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인수위)'에 전문위원으로 참여했던 때였다. 홍장관의 기억 속에 또렷이 각인되어있을 2013112. 그날은 인수위 외교국방통일분과 최대석 위원이 사퇴한 날이다.

 

최 위원은 인수위에서 대북대화파를 대표하는 인사였다. 최 위원은 이화여대 교수로서 2000년대 중.후반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공동대표와 평화나눔센터 소장을 맡으며 대북 지원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박근혜 당시 당선인의 오랜 통일정책 조언자였다. 박근혜정부의 대북정책인 한반도신뢰프로세스를 입안 기획한 인사가 바로 최 위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신뢰프로세스에 대해 기대를 가졌던 이유다. 한반도신뢰프로세스에는 중요한 기조가 포함되어있다. ‘727.4공동성명을 비롯해 ‘91년 남북기본합의서 그리고 6.15공동선언과 10.4선언 등 기간 남북합의를 존중한다는 내용이 그 안에 있었던 것이다.

 

"현 정부의 5·24 조치는 북한을 응징하기 위한 것이지만 우리 국민과 기업의 불안과 손실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국민을 위해 그리고 차기 정부를 위해 5·24조치의 단계적 해제가 취해져야 한다"

최 교수가 2012년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장으로 낸 학술지 기고문에 나오는 구절이다.

 

최 교수의 인수위 참여에서 많은 사람들은 박근혜정부의 대북정책이 비핵개방 3000’으로 대북대결적이었던 이명박정부와 차별성을 갖게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렇지만 최 위원의 인수위 활동은 일주일도 안되 중도하차되고 만 것이다.



 


한반도신뢰프로세스와 관련하여 최 위원의 사퇴만큼 중요한 것은 사실, 없다.

최 위원이 인수위에서 중도하차한 것과 관련해 많은 설들이 있지만 가장 지배적인 것은 '외교국방통일분과'에 함께 참여했던 김장수 위원과 윤병세 위원 등에게 밀려났다는 것이었다

김장수 위원은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인 백승주 인수위 전문위원과 더불어 천안함 사건에 대한 북한의 책임 있는 태도 변화가 우선이라는 점을 강조한 대표적 인사다. 대북 강경파인 것이다.

 

이것은 최 교수의 인수위원 사퇴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에서 그 신뢰를 거세해버린 사건이라는 것을 가장 명징하게 보여준다.

 

최 교수가 대북대결론자들에게 포위되었다가 밀려나고 말았던 그때의 상황은 홍 장관에게 있어 지금에 와서도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김장수 위원은 국가안보실장이라는 권력의 중심부를 구성했었으며 현재는 주중대사다. 윤병세 위원은 장수하고 있는 외교부 장관이다. 홍 장관과 함께 전문위원으로 활동했던 백승주 전문위원은 지금 국방부차관이다. 이렇듯 대북대결론자들은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 위에 있는 것이 박대통령의 반북공세며 최종적인 그 위는 당연히, 미국의 대북대결정책이다.

 

홍 장관의 슬픔은 그런 점에서 대북화해의 기류가 미국으로부터 정권으로부터 거세당하고 만 데에서 빚어지고 있는 숙명적인 슬픔이다.

 

그렇다면 홍 장관은 그 슬픔이나 좌절을 언제까지 지속시키게 될 것인가?

 

경우에 따라서는 홍장관은 지금 슬프지 않을 수 있다는 말도 돈다

과거 최 위원과 함께 했던 인수위 시절을 털어버리고 반북공세의 대열에 합류하는 변신을 꾀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시절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던 윤병세 외교부장관과 김장수 대사가 지금 가고 있는 그 길에 동참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그것조차도 홍 장관에게는 또 다른 슬픔일 수밖에 없다

전임 통일부 장관처럼 남북관계 개선에서 그 어떤 특별한 성과도 남기지도 못한 채 다만 장관을 했다는 경력만 그에게는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