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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권말선

[시] 비에 잠기다(悲感)

by 전선에서 2022. 4. 29.

비에 잠기다(悲感)

권말선

비가 온다
새벽 4시 반
안방 천장에서 비가 내린다
또닥 또닥 또닥 소리에
잠이 후닥
달아났다
옥상 방수공사를 끝냈다는데
비는 어느 약한 틈을 타 
이 새벽 내 방 안까지 내리는 걸까

천장에서 내리는 비는

떠덕

따닥 
풀어야 할 암호로 변했고
떨어지는 비를 받아놓고는
저 비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어느 틈을 따라 여기로 왔는지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몰라
멍하다
엊그제 마신 독주가 혈관을 맴돌다
더는 갈 곳 없어
역류하여 닿은 곳이 천장인 걸까
뚝 뚝 따
똑 똑 따닥
쓰거운 가난이
비에 잠긴다

이 비에도 일터로 가시는지
공사장으로 출근하는 이의 새벽
어둠을 땅땅 깨는 발걸음 소리
뒤로 여기저기 대문 여닫는 소리
이어 창이 푸르스름 밝아 오고
옆에선 다시 잠든 이의 고른 숨소리
빗물 머금은 전등도 암호를 깜빡이는데

골똘하기를 그만 포기하고 가난을 잠시
잊기로 했다
떨어지는 비소리가 장구 장단 같다고
생각키로 했다
다리 뻗고 누워 발가락 까딱이며 잠을
청하기로 했다
내가 보러 가지 않은 비가 나 그리워 온 거라
여기기로 했다
물 젖은 등 깜빡임이 잦아들 때쯤엔
비가 오는 날엔 얼른 비를 맞으러 가야겠다고
안방 아이방 부엌, 벽이고 창이고 천장으로
비가 찾아오기 전에 내가 먼저 가야겠다고
가난 아닌 게으름을
탓하기로 했다

선잠 끝에 코 한 번 골고 나니 
비 그쳤다
살았다

인터넷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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