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
권말선
여덟 시간 내내 고기를 썬다
산더미처럼 쌓인 고기 뭉치
지방은 적당히 발라내고
살코기 붉음이 돋보이도록
자른다 썬다 휘두른다
제법 능숙해지는 칼질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칼과 손은 이미 하나다
칼날 둔해지면 야스리 움켜잡고
날을 간다, 앞뒤로 슥 삭 슥 삭
살점마다 허옇게 들러붙은 기름덩이
갈 끝 얹기만 해도 단박에 떨어지게
살코기 콱 물고 버틴 뼈다구
살짝 힘만 주어도 금세 발라내게
바짝 간다, 세운다
칼날, 휘두를 준비가 됐다
어쩌면 전생에 백정이었을까
등판 넓고 피부 거무스름한 사내
남이 정한 신분쯤은 무시하고
제가 닦은 눈빛만은 쨍한 그런
탐관오리 수탈도 양반네 멸시도
호시탐탐 집적대던 왜놈도 양놈도
움켜쥔 칼 잘 세워진 날로
죄 발라내던 솜씨 좋은 그런
백정이면서 의적 때론 의병이었을까
긴 세월 슬었다 녹았다 다시 살아난
그의 칼, 지금 내가 쥔 건 아닐까
누구나 귀중한 누구나 주인인 그런
참세상에의 열망, 내게까지 이어진 걸까
자본의 밑바닥 노동에 허덕이면서도
자존심 쨍하게 붙들고 사는 건
뼈다귀 발라내듯 무능적폐
기름덩이 제거하듯 매국배족
백정답게 발라내기 위함 아닐까
여덟 시간 내내 칼을 휘두르며
노동을 가장한 이것은 연습이라고
백정인 양 칼 쥔 손 힘 꾹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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