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권말선
내 어릴 적 살던 고향......
낮은 산 아래, 그보다 좀 더 낮은 언덕을 끼고
작은 시내 돌돌 흘러 내리던 곳.
그때는 몰랐었지,
시냇물 첨벙대며 뛰어다니고,
언덕에 올라 잔디를 밟으며 메뚜기를 잡는 것이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를.
한여름 굵은 소낙비에 개울이 불면
치마를 걷어 부치고 강으로 들어가서
긴 머리 풀어헤쳐 감곤 했었지.
허리굽혀 흐르는 강에 머리를 담그면
강물 따라 가지런히 흘러내리던 까만 머리카락들!
누가 키워 주지 않아도 저절로 꽃 피던 봉숭아,
두엄위에서 아버지 키보다 높이 자라던 노란 해바라기,
두려움을 무릎쓰고 올라가 놀던 나이 든 감나무야,
옆집 담너머에서 툭 떨어져 오던 노랗게 익은 살구와
돌담 사이사이 돋아 나던 정구지도 그리워...
이름도 다 모를 풀꽃들은
철철이 잊지 않고 피어나고
텃밭에 자라던 딸기, 가지, 토마토, 고추가 어여뻐
나는 차라리 농부가 되리라 생각했던 소녀적의 그 고향.
풋사과를 씻지도 않고 베어 먹고는
배탈이 났었던 어린 시절엔
가난한 생활이 고달프다고 투정했지만
이제사 돌아보는 그때에
나는 어쩌면 그리도 큰 부자였는지!
예쁘게 피던 감꽃 떨어지면
실에 나란히 꿰어 목걸이를 만들고
늘어진 가지마다 발그라니 익어가던 홍시감들...
마루에 올라 멀리 앞산을 바라다 보시며
아버지는 저 산에 사과가 익어간다고,
구름이 시커먼 게 산너머에 비가 온다고,
누구네 아버지 들에 갔다고
신기한 말씀을 하곤 하셨지.
철없는 스물에 떠나온 뒤로
고향 멀어진 지 벌써 10년이라니!
이제는 그 마을도 도시처럼 돼 버렸다던데
내 살던 아버지의 그 너른 집도
정말로 간 곳도 없어졌다던데...
내 꿈속,
내 가슴속 가장 따뜻한 곳에는
철교 놓인 긴 강, 찔레꽃 군데군데 피어나던 황야같은 들판,
새하얀 눈 속에 파묻히던 마을과 몽글몽글 솟아나던 굴뚝 연기와
내 아버지 기르시던 앞마당 율무밭과 버선꽃을 피우던 가시돋힌 나무들
아무리 말하여도 끝이 없는 풍경,
사랑스런 그 풍경들이 펼쳐 있어라.
아, 행복했던 거기 먼 - 그리운 그곳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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