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서점에 들러
권말선
어릴적엔 서점에 가면
이 서점 책을 다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었지
몇 날 몇 일이고 서점에 앉아
책만 읽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었지
나중에 커서 서점 주인이 되면
손님을 기다리는 한가한 시간
서점 책을 죄다 읽으리라
막연한 상상에 즐거워했더랬지
그랬었어, 어릴 때
인터넷으로 책을 사고
중고로 책을 사고
강연장에서 책을 사고
그러는 사이 점점 서점은 멀어지다
약속시간이 남은 어느 날
시간 떼우러 들른
광화문 한 서점에서
그만 놀라 길을 잃었지
서점이 책만 파는 곳이 아닌
만물상이 되어 있었던게야
눈이 휘둥그레져 돌아다니다
책 아닌 펜 앞에 멈춰 서서
살까나 말까나
한지에 펜으로 시를 써 볼
궁리에 빠져 요것조것 쳐다보다
흠, 나중에 인터넷으로 사야겠다
다시 서점을 배신하고 돌아섰지
너 그럴 줄 알았다며 원망도 않는
기대도 안했다며 붙잡지도 않는
저 서점은 몇 년 후엔 다시
만물상 아닌 또 무엇으로 바뀌어있을까
어째 그게 다 내 탓인 것도 같고
너무 변해 서먹하기도 한
그런 맘으로
술이 기다리고
시가 기다리고
사람이 기다리는 곳으로
낮술에 슬쩍 기댄 정신 붙들며
터덜터덜 만물상을 빠져나왔지
근데, 그 펜 살걸 그랬나
그 놈으로 한지에 시를 쓰면
어쩐지 멋있을 거 같았는데
어쩐지 폼 날 거 같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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