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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권말선/그이의 환한 미소(두번째 시집)

어느 날, 서명을 받으며

by 전선에서 2014. 6. 12.

어느 날, 서명을 받으며


 

                          권말선


 

여학생 몇이서 조르르 몰려가다

<세월호> 글자 앞에 멈춰서더니

이름, 전화번호, 주소 그리고 싸인까지

꼭꼭 눌러 적고는 

예쁘장한 목소리로

“수고하세요.” 인사까지 한다. 

“고마워요.” 

나도 웃으며 인사했지만

부끄럽고 죄스러운 어른의 고백

'미안해요’는 

말하지 못했다.  

 

연세 지긋한 어르신 한 분이

“이거 하면 뭐가 나아지나?”

퉁명스레 물으시길래

조용히

“어르신 아이들이 배에 탔어도 

그리 말씀하실 수 있으실지요?”

했더니 잠시 머뭇머뭇 거리다가

“그 말이 가슴에 와 닿는군.”

하신다.   

 

신사 한 분이 와서 

“정부가 다 조사하고 있는데 꼭 이런 거 해야 합니까?”

하셔서

“여당 의원들 팽목항에 내려가지도 않았다지요?

전문가와 가족 중심의 진상조사단이 꾸려져야 합니다.”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긴 얼굴로 가신다. 

 

옆에서 함께 서명 받으러 온 

유가족이 외친다.

“유가족입니다. 서명 부탁합니다.”

함께 하는 몇 시간을 

차마 그 분 얼굴 바라보지 못하다

나도 따라 두 어 번

“유가족과 함께 서명을 받고 있습니다.”

해 봤지만, 말끝은 흐려져 버렸다.

‘유가족’이란 말은 이렇게 아픈데

저 분은 그 아픈 말을 

계속 외치고 있었구나... 

 

헤어지며 인사 나누다 바라 본 얼굴,

모자를 썼어도 까맣게 그을렸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도움 되지 않는 한 마디를 결국 해 버렸다.

“힘 내세요.”

소중한 가족을 잃었는데 

어찌 힘이 날까, 

바보! 하며 속으로 나를 꾸짖는데

그냥 가만 웃으신다. 

당황스런 맘에

“또 뵐게요.” 했다. 

“네, 수고하셨어요.”하며 

웃으시는데

이 뙤약볕을 또 나오시라고 했구나, 싶었지만 

다시 어쩌지 못하고

그냥 서둘러 돌아섰다.  

 

노량진역 

개찰구 밖으로 

사람들이 마구 쏟아져 나올 때마다

저 많은 사람들 

모두 다 줄지어 서서  

서명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그 생각만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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