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서명을 받으며
권말선
여학생 몇이서 조르르 몰려가다
<세월호> 글자 앞에 멈춰서더니
이름, 전화번호, 주소 그리고 싸인까지
꼭꼭 눌러 적고는
예쁘장한 목소리로
“수고하세요.” 인사까지 한다.
“고마워요.”
나도 웃으며 인사했지만
부끄럽고 죄스러운 어른의 고백
'미안해요’는
말하지 못했다.
연세 지긋한 어르신 한 분이
“이거 하면 뭐가 나아지나?”
퉁명스레 물으시길래
조용히
“어르신 아이들이 배에 탔어도
그리 말씀하실 수 있으실지요?”
했더니 잠시 머뭇머뭇 거리다가
“그 말이 가슴에 와 닿는군.”
하신다.
신사 한 분이 와서
“정부가 다 조사하고 있는데 꼭 이런 거 해야 합니까?”
하셔서
“여당 의원들 팽목항에 내려가지도 않았다지요?
전문가와 가족 중심의 진상조사단이 꾸려져야 합니다.”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긴 얼굴로 가신다.
옆에서 함께 서명 받으러 온
유가족이 외친다.
“유가족입니다. 서명 부탁합니다.”
함께 하는 몇 시간을
차마 그 분 얼굴 바라보지 못하다
나도 따라 두 어 번
“유가족과 함께 서명을 받고 있습니다.”
해 봤지만, 말끝은 흐려져 버렸다.
‘유가족’이란 말은 이렇게 아픈데
저 분은 그 아픈 말을
계속 외치고 있었구나...
헤어지며 인사 나누다 바라 본 얼굴,
모자를 썼어도 까맣게 그을렸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도움 되지 않는 한 마디를 결국 해 버렸다.
“힘 내세요.”
소중한 가족을 잃었는데
어찌 힘이 날까,
바보! 하며 속으로 나를 꾸짖는데
그냥 가만 웃으신다.
당황스런 맘에
“또 뵐게요.” 했다.
“네, 수고하셨어요.”하며
웃으시는데
이 뙤약볕을 또 나오시라고 했구나, 싶었지만
다시 어쩌지 못하고
그냥 서둘러 돌아섰다.
노량진역
개찰구 밖으로
사람들이 마구 쏟아져 나올 때마다
저 많은 사람들
모두 다 줄지어 서서
서명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그 생각만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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