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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과 전망/사회문화비평

밭에도 서재에도 화실에도 그는 없었다.

by 전선에서 2014. 12. 30.


밭에도 서재에도 화실에도 그는 없었다.  

<특별한 신혼여행>춘천에 있는 농부이자 화가인 정설교 시인을 찾아서



 

▲ 평창에 있는 정설교 시인의 황토집    © 한성 자유기고가

 

 

그는 없었다. 

추운 겨울날이기는 하지만 밭에서 삽이나 괭이를 잡고 있어야할 그였다. 

화실에도 그는 없었다. 

시를 쓰는 서재에서 그를 찾을 수 없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밭에 혹은 황토로 지은 그의 넓은 집 거실이나 화실 그리고 서재에는 그의 부인의 한숨만이 그의 자취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 부인의 한숨은 크고 깊었다. 슬픔과 고통이 버무려진 한숨일 터였다. 손에 만져지고도 충분히 남았다. 

 


▲ 정설교 시인의 집에서  확인되는 농부기질     © 한성 자유기고가



그는 이 추운 날 밭에도 집에도 없고 어디에 있는 것일까 

농부가 밭에 있지 않고 

화가가 짬 나는 시간에 화실에 있지 않고 

시인이 늦은 밤 서재에 있지 않고 도대체 어디로 가고 없는 것일까?

 

▲ 2014년 12월 29일   © 한성 자유기고가

 

“1년 4개월째예요”

그의 부인은 그렇게 말을 했다. 전화 속 목소리였지만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집을 떠난 것은 지난해 2013년 9월이었다. 

 

그가 있다는 춘천. 우리는 춘천을 향해 차를 몰았다.

날이 흐렸다. 춥기도 했다. 세상은 그 날씨에 맞추어 온통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고속으로 지나가는 도로 양 옆에는 산들이 무수하게 차창을 스쳐지나갔다. 다들 납작, 엎드려 있었다. 

 

▲ 춘천가는 길에  무수히 만난 길고 긴 터널    © 한성 자유기고가



우리는 터널 속을 지나갈 때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시대를 떠올렸다. 길고 긴 터널이었다. 

광복 70주년이 되는 2015년이 몇 일 남지 않은 지금, 권 시인은 탄식처럼 한마디를 내뱉었다. 

“인류역사에 이리도 긴 터널이 있었던가?”

 

“힘들어요.” 

그의 부인의 한숨은 여전히 길었다. 그도 힘들겠지만 자신은 물론 두 아이들이 힘들다는 것을 그의 부인은 조목조목 얘기했다. 

그 고통에 함께 하고 있는 것이리라. 권 시인 역시 길고 긴 한숨을 쉬곤 했다.

 

터널을 빠져나가자 밝은 빛처럼 이정표가 나타났다. 그가 있는 춘천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참을 더 달린 뒤에야 우리는 마침내 그를 만날 수 있었다. 

 

▲ 2014년 12월 29일    © 한성 자유기고가



“아이 이놈들이 왜? 우리 황선씨와 신은미 교수님 그리고 이적 목사님 등을 괴롭히는 것이요? 엉?”

몇 개월 만에 만난 것에 필요한 안부를 확인하고 난 뒤 그가 꺼낸 첫마디였다. 정세의 복판을 관통하는 지적이었다. 

 

“하하하 워낙 제대로 사업을 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정설교 화가의 옥중 작품     © 한성 자유기고가


박근혜 정부의 종북몰이에 대해서 그와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민중을 중심에 두고 역사를 보는 사람들이라면 그 종북몰이가 불합리하고 문제가 많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종북몰이에 수세적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종북몰이는 종북몰이의 부당함을 단순히 말로만 해설하고 논리적으로 설파한다고 해서 극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단순히 몇 마디 논리로 깰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종북몰이가 지금에 와서 이처럼 횡행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것에 그와 우리의 견해는 일치했다. 

 

우리는 그에게 지금의 박근혜정부의 종북공세에 맞서는 것으로 반보수 민족대단결운동이 필요한 것이라고 귀뜸을 해주었다.

그의 옆에 있는 사내는 무엇인가 열심히 적고 있었다. 

 

“좋네요 하하”

“그럴만도 하지요. 반보수 민족대단결운동이라는 그런 말이 한겨레신문 같은 데서는 안 나오는 말이쟎소”

“황선씨나 이적 시인의 활동이 아하, 그런 의미가 있었군요. 하하”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렇지만 10분은 당연하게도, 순식간이었다. 

농부이자 화가인 정설교 시인은 접견실 아크릴 판에 손을 댔다. 나와 권 시인 역시 그에 맞추어 손을 올렸다. 

흘러야할 온기. 가로막혀 흐르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느낄 수도 없었다. 이 아크릴 판이 휴전선 같기만 하다고 권 시인이 한마디 했지만 스피커는 이미 꺼져있는 상태였다. 

▲자주민보에 보도된 정설교 시인의 그림작품에 대한 독자분들의 애정     © 한성 자유기고가



“정설교 시인님 건강하십시오 또 뵙겠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춘천 교도소에 수감되어있는 정설교 시인과 헤어졌다. 1심 확정인 1년 6개월이 되는 내년 2월에 나오게 될지 아니면 이전 사건에 대한 집행유예기간인 1년이 합산되어 앞으로 1년 2개월을 더 있어야할지 지금으로서는 그 어느 것도 쉽게는 확정할 수 없다. 

 

우리는 춘천교소도를 나와 시동을 다시 걸었다. 가야 할 곳이 있었다. 차는 북을 향해 쏜살같이 달렸다. 북으로 북으로였다. 

 

▲강원도 고성 화진포 가는 길     © 한성 자유기고가

 

▲남한의 최북단에 있는 해수욕장 중에 하나인 화진포 해수욕장     © 한성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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