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한미군의 본질과 주한미군 철수 1.2차 대결전
<분석과 전망> 평화협정 체결 전망과 경로
6월 30일 판문점에서 북미정상회동은 사실상 3차 북미정상회담이었다. 다만 비밀회담이었다. 3차 북미정상회담에서 압권은 트럼프 대통령이 월경해 북 땅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 악수를 한 풍경이다. 북미적대관계 종식을 선언한 것이었다. 특히 사실상, 북미종전선언을 한 것이었다. 북미대결전 역사에 길이 남을 백미다. 북미 종전선언은 4차 북미정상회담을 앞당겨 평화협정 체결로 이어지는 공정에서 첫 입구다. 올해로 66년을 맞는 7.27 정정협정일을 앞두고 평화협정에 대한 글을 연재해서 싣는다. 특히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주한미군 철수 문제와 결부해 그 전망을 밝히는 데에 주안점을 뒀다 <편집자 주>
1.주한미군의 본질
통일운동은 발전하면서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필연적으로 부각시키게 된다. 한반도 근본문제에서 가장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주한미군이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이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45년 9월 8일이었다. 그 때 이후 주한미군은 이름도 모자도 여러 개로 만들어 쓰고 있다. 기본은 맥아더가 3.8선 이남에 진주하면서 뿌린 포고문에 나와있듯 3.8선 이남을 점령한 ‘대남 점령군’이다. 3년간이나 군정을 실시해 한국을 정치적으로 장악했다. 주한미군은 1950년 7월엔 유엔사라는 모자를 쓰고는 북을 점령해 ‘통일한국’을 수립해야하는 ‘대북 점령군’이 되었다. 유엔사는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이후엔 정전협정을 관리하는 ‘정전체제 관리군’이라는 모자를 하나 더 늘려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다. 주한미군은 이어 1978년엔 또 다른 모자도 쓰게 된다. 한미연합사이다. 한미연합사는 1953년 10월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 ‘한국이 위협받고 있다고 인정될 경우 언제든지 미국은 자국의 육·해·공군을 대한민국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비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대한민국은 이를 허락한다”는 조항에 근거해 만든 모자였다. 한미연합사는 출범하면서 유엔사가 갖고 있던 국군 작전통제권까지 넘겨받았다.
주한미군은 이처럼 ‘점령군’으로 들어와 유엔사라는 이름으로는 평상시엔 ‘정전체제 관리군’으로 유사시엔 북을 점령해 ‘통일한국’을 수립하는 ‘대북점령군’으로서 그리고 한미연합사라는 이름으로는 한국의 정치군사안보를 틀어쥔 사실상 ‘통치군’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치군사안보적으로 최고의 대북적대기제이자 최적의 대남종속기제로서 본질을 갖고 있는 게 주한미군인 것이다. 주한미군을 그대로 두고서는 한반도 평화체제라는 마을을 온전하게 꾸릴 수 없는 결정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전망을 세워야만 한반도 평화체제라는 마을을 이쁘고 탄탄한 모양새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대표적인 미국 정치인으로 세 사람을 꼽을 수가 있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지미 카터 대통령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이다.
2.‘Two Korea Policy’ 정책과 주한미군철수 1차 대결전
‘아시아 우방국들은 스스로 안보를 책임져야 한다'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은 1969년 7월 25일 그렇게 말했다. 대선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선거 공약으로 들고 나와 1968년 11월 당선되고 난 뒤 한 말이다. 이른바, 닉슨독트린이다. 닉슨은 의원이었던 2년 전인 1967년 10월 포린 어페어스지에 "베트남 이후의 아시아"라는 논문을 발표해 ‘미국이 더 이상 세계의 경찰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었다. 구체적으로 베트남 미군 철수 등 아시아에서 미국의 개입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닉슨의 주한미군 철수안은 닉슨독트린에 따라 수립한 ‘한반도 두 개 국가 정책’(Two Korea Policy)에 기초한 것이었다. ‘Two Korea Policy’는 닉슨이 새롭게 세운 한반도 지배전략으로 기본적으로 북의 주한미군 철수 공세에 밀린 수세적 대응이었다. 국제정치적으로는 70년대 중미 ‘데탕트’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주한미군 없이 분단체제를 유지하겠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닉슨독트린에 따라 미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주한미군 2개 사단 철수안을 검토한 건 1969년 8월이었다. 신속한 조치였다. 한국군을 현대화하고 미 공군 병력을 향상시키는 것을 전제로 했다. 타이딩스 미 상원의원도 1970년 4월 9일, 의회에서 ▲ 한국군 자력 방위 가능 ▲ 중국 침공 가능성 희박 ▲ 미군 본토 전력 31시간 내 한반도 전개 가능 ▲ 불필요한 미국 인명·재정 피해 등의 이유를 들며 주한미군 1개 사단을 철수할 것을 주장했다. 국군 전방 배치 그리고 한국에 배치된 핵무기 또한 즉시 철수할 것도 권고하면서였다. 1970년 8월엔 애그뉴 부통령이 나서 더 강력한 주장을 내놓았다. 한국군 현대화가 완료되는 5년 후에는 주한미군이 완전 철수하게 될 것이라고 쐐기를 박은 것이다.
닉슨의 주한미군 철수안에 대한 미국 내 반발이 만만치가 않았다. 윌리엄 로저즈 국무장관을 비롯해 특히 헨리 키신저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반대를 했다.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 미 육군 참모 총장은 ‘미 육군 2개 사단을 감축시킬 경우 미국의 아시아와 유럽에서의 방위 공약 수행 능력을 해치는 결과가 될 것’이라며 공개적으로 항명하기도 했다.
미국 내 주한미군 철수 반대 여론은 그러나 닉슨의 결심을 막는 데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 닉슨 정부는 마침내 1971년 3월 7사단 병력 2만명을 철수시켰다. 닉슨독트린이 발표된 지 2년 만이었다. 닉슨의 주한미군 철수는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이후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으며 1974년 닉슨 대통령의 사임으로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3.카터의 주한미군 3단계 철수안과 주한미군철수 2차 대결전
닉슨 독트린과 ‘Two Korea Policy’의 문제의식은 카터 대통령으로 이어졌다. 주한미군 철수 공약을 들고 당선된 카터 대통령은 1977년 3월 10일 5년 내에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3단계 철수안이었다. 2사단 병력 가운데서 1개 여단, 6000명의 병력을 1978년 말까지 철수시키는 게 1단계였으며 2단계는 나머지 1개 여단과 지원부대의 9000여 병력을 1980년 6월까지 철수시키는 것이었다. 카터는 3단계로 주한미군사령부 해체를 제시해 주한미군 철수를 완결한다는 계획이었다.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반발은 닉슨 정부 때 보다 훨씬 심했다. 특히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었다.
존 베시 주한미군 사령관이 조직한 ‘싱글러브 항명 사건’은 지금도 유명하다. 주한미군 참모장인 싱글러브가 1977년 5월 9일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를 통해 “카터의 철군 계획은 2~3년 묵은 군사정보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지난 12개월 동안 북한 군사력은 훨씬 강력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면서 “남한에서 미 지상군을 모두 빼 가면 남북한 모두에게 미국이 한반도에서 손을 떼는 것으로 인식돼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고 해 카터 대통령에게 정면에서 항명을 한 것이다.
주한미군 철수에 반대하는 의원들은 「철군 보완조치」를 입법해 철군이 유지하는 것보다 비용 면에서 비싸다는 여론을 돌렸다. 이어 미 군부와 정보기관이 회심의 카드를 들고 나왔다. ‘세계군사력 균형에 관한 보고서’였다. 보고서는 북의 군사력이 1971년에서 1972년 사이에 이루어진 군사력 증강의 결과로 10년 전에 비해 거의 2배로 증강되었다고 기술했다. 북의 탱크와 야포도 수적으로 한국군의 2배일 뿐 아니라 대부분의 화력과 병력이 휴전선 쪽으로 전진 배치되어 있으며 북의 총 병력 또한 그동안 집계되었던 48만5000명에서 68만명으로 증가되었다고도 했다. 지상군을 철수하더라도 미 공군과 해군의 전략자산과 한국의 군사력을 결부시키면 전쟁억지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카터 대통령의 주장을 직접 겨냥한 것이었다.
보고서가 의회에 알려지자 철군 계획 반대 여론이 비등했다. 지상군은 단계적으로 철수하되 공군 및 해군 지원은 계속 하겠다는 것을 강조했던 카터의 주장은 큰 타격을 받았다. 미국 핵무기의 우산 하에 한국의 지상군과 미국의 해ㆍ공군이 결합하면 재래식 전쟁억제는 충분하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로 설득력을 잃어갔다. 행정부 수뇌들 사이에서 “이제 철군은 종을 쳤다”는 말이 나왔으며 “1979년으로 해가 바뀔 무렵 미국 정부 안에서 주한 미 지상군 철수를 지지하는 사람은 카터 대통령 한 사람뿐”이었다는 말까지도 돌았다. 1978년 1월 8일 뉴욕타임즈는 “보고서는 북괴의 기습공격으로 한반도에 전쟁이 나면 서울을 점령당할 수 있다고 경고했으며 이에 따라 카터행정부는 주한미지상군의 철수계획을 재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카터는 여론에 완전 포위되는 양상을 띠었다. 한반도 긴장 완화의 근거로 삼기 위해 극비로 추진했던 1979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의 남·북·미 회담을 폐기할 수 밖에 없었다. 카터 대통령은 결국, 1979년 2월 ‘주한미군 철수 잠정 보류’를 발표했다. 카터의 주한미군 3단계 철수안은 단 한 치도 진전되지 못하고 그렇게 완전 백지화되고 만 것이다.
3.주한미군 철수 반대 세력의 실체
닉슨의 주한미군철수안이 일부 감축으로 중단되고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안이 시도조차 되지 못하고 무산된 것은 카터 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미국 내의 강력한 반발을 무력화시키지 못해서였다. 일부 전문가들은 닉슨의 사임을 불러왔던 워터게이트 사건이 닉슨의 주한미군 철군안과 무관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놓고도 있다.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한 미국 내 주류세력들이 닉슨의 실수를 확대.과장하여 닉슨을 정치적 궁지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주한미군 철수안이 두 번 난파되는 과정은 미국 내 주한미군 철수 반대세력의 실체가 누구인지를 또렷하게 드러내주었다. 미국의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 MIC)를 위시하여 금융자본 그리고 이들과 정치경제적으로 밀착된 미 외교정책의 기득권층(Establishment)들이 그들이었다. 군산복합체가 백악관 권력과 의회 권력을 비롯해 사회 지배그룹에 침투해들어 구축한 구조와 체계는 막강했다. 워싱턴을 기반으로 상원의원과 하원의원,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로비스트·사업가·법률가·학자들 그리고 이들이 관장하는 기자·방송인 등 언론계를 다 망라했다. 흔히 미 주류세력으로 불리워진다. 사회과학적 개념에 의하면 ‘미 제국주의’다. 그들은 민주당과 공화당을 구분하지 않으며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지도 하지 않는다. 부시 행정부 때 ‘네오콘’들로 외화됐었다. 클린턴 행정부 때는 ‘글로벌리스트(Globalist)’로 오바마 행정부 때는 ‘국제주의자’로 표현되었으며 그리고 현재 트럼프 정부시기 때 들어서는 ‘딥스테이트(Deep State)’로 불리워지고 있다.
이것들은 주한미군 철수를 둘러싼 미국 내 대결이 미국 내 평화세력과 전쟁세력 간의 투쟁이라는 것을 확정해준다. 그런 점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둘러싸고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대결전은 전쟁세력의 승리로 마감된 셈이었다.
그러나 주한미군철수 대결전은 트럼프 정부 들어 다시 시작되고 있다. 이른바, 주한미군철수 3차대결전이다.
_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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