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 혹은 분단의 고통 그리고 바다
-영화 ‘바다로 가자’를 보고 드는 생각-
바다에 몸을 실으면 아버지가 고향에 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이었을까? 영화 ‘바다로 가자’는 바다를 보여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버지의 고향이 바다여서 더 그랬을 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자신 삶에서 8할 이상을 고향에 칭칭 묶어두고 살았을 것이다. 모든 실향민들이 다 그렇듯, 그 무슨 천형처럼.
‘개가 아니라 사람이쟎아’
웃음을 잃고 말을 잃고 급기야 기억을 지우는 긴 침묵의 시간으로 진입하기 전, 아버지는 그렇게 짧은 설명을 주었다.
어렸을 적 아버지와는 소통이 되지 않았다. 너무 싫었다. 그저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아버지일 뿐이었다. 가족들은 아버지의 고통을 치유해 보자고 굿을 해보기도 했었다. 무당의 의례는 사람들이 만든 분단에 의해 가로막힌 고향길을 신에 의거해 터보겠다는 서러운 몸짓이었다.
아버지는 생을 정리하는 마지막 공정에서 병, 알츠하이머를 맞는다. 어디 스스로 부른 것이었을까마는,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고향에 대한 그 회한과 고통의 짐을 벗어보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어제만큼이나 생생하게 갖고 있던 고향에 대한 기억의 끈을 아버지는 그렇게 놔버리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딸이 아버지를 새롭게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실향에 버무려져 있는 회한과 그리움 그리고 원망과 고통의 깊이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나서였다. 아버지를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정치적 아버지로 즉, 전쟁의 복판을 가로질러 분단체제에 사는 역사적 존재로 만나게 된 것이었다.
한국사회에서 실향은 단순히 절단된 가족사가 아니다. 거의 대부분이 그렇듯 전쟁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허나, 다른 나라의 실향과는 사뭍 다르다. 실향은 한국전쟁으로부터 비롯되었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한국사회의 실향이 무시로 떠오르는 기억의 감정에 그치지 않고 회한과 그리움 그리고 아픔, 특히 더 나아가 원망과 서러움이라는 여러 감정선으로 덪칠되어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은 분단 때문이다.
분단을 남북 간 문제로만 볼 수는 없다. 세계질서가 특정한 정치안보적 이익을 생산하기 위해 만들어낸 정치역사적 기제가 분단이다. 눈 앞에 일렁이는 파도를 보는 관점이 아니라 저 멀리 아득한 수평선을 바라보는 넓은 시야로 본다면 분단 생산자는 전쟁의 생산자가 그렇듯 남이 아니라 북이 아니라 미국의 전쟁세력들이다.
한국사회는 분단을 불편해하는 사람들과 분단에 익숙한 사람들로 나눌 수 있다. 분단이 불편한 건 핏줄 상 원초적이다. 그러나 분단에 익숙한 것은 저절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분단체제가 체계적으로 작동해 만들어낸 사회정치적 현상이다. 분단체제는 분단체제를 만들어낸 목적에 따라 수많은 이익들을 생산해낸다. 정치와 안보, 경제와 사회 등 모든 영역에서 계량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고 또한 깊다.
많은 사람들이 ‘빨갱이’로 표현되는 대북적대가 대낮에 벌겋게 돌아다니고 또 그 잣대가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특정한 곳으로 가서는 예리한 칼날로 변해 피를 뭍히기도 하는 것과 수도 없이 마주해야했다. 분단체제가 이익을 생산하고 보유하기 위해 굴리는 가장 대표적인 공정 중 하나였다. 그럴수록 분단에 익숙한 사람과 분단을 불편해 하는 사람들 간의 간격은 더 넓어지고 깊어졌다. 그 옆에 따라붙은 궤적이 실향을 그리움의 실체에서 고통과 원한의 실체로 바꿔낸 체계였다.
영화 ‘바다로 가자’는 분단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다가들 수 있을 것인가?
쉬운 일이 아니다. ‘아, 영화 괜챦네. 감동적이야’라는 것으로 치환될 것으로 여긴다면 순진하거나 낭만적이다. 분단에 익숙한 사람들은 분단체제가 생산해내는 것들에 관심이 없거나 애써 외면한다. 실향의 아픔과 회한 고통에 대해 속도 눈도 주지 않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영화 ‘바다로 가자’는 분단에 익숙할 수도 있었을 딸이 분단의 아픔을 소통하고 나누며 함께 고통스러워하는 몸부림이다. 분단체제를 이고 사는 딸이 분단의 피해자 아버지에게 주는 헌사인 것이다.
딸은 긴 침묵의 시간에 종지부를 찍는 아버지의 마지막을 오열로 맞으면서 실향민 3세대인 젊은 청년을 통해 가슴 속 말을 토해낸다. '아픔은 치유가 필요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치유할 수가 없다'. 통렬하다. 정확해서다. ‘치유할 수 없다’니, 또한 서럽다. 그러나 역설적이다. 전쟁과 분단의 뿌리와 실체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내놓지 못할 진단이다.
영화는 그러나 실향의 근원인 전쟁과 분단이 왜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이야기도 해주지 않는다. 문제가 될 리는 없다. 외려, 영화답다. 대중 속에 대중과 함께 하는 팔자인 대중예술로서 영화가 갖는 미덕일 수 있다.
영화가 드러내주지 않는 전쟁과 분단의 원인을 좆아보는 건 영화를 맞는 관객들의 몫이다. 관객마다 다르겠지만, 영화 ‘바다로 가자’에서 압권은 한 실향민이 바다를 바라보면서 노래 ‘바다로 가자’를 부르는 대목이다.
서정적인 노랫말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바다 풍경. 전혀 정치적이지 않다. 허나, 분단체제라는 현실에 발을 딛고 바라보면 완연히 달라진다. 대단히 정치적이다. ‘수평선 너머에는 그 어떤 장벽도 보이지 않는다’는 영화포스터. 얼마나 정치적인가! 일종의 역설이다.
사람들은, 바다에는 장벽이 없지만 바다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것이 곳곳에 즐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가공이 아니다. 눈 앞에 펼쳐진, 하루에도 수도 없이 접하는 현실이다.
남북철도 공사라는 민족사적 토목공사를 주한미군사령관이라는 별 네 개짜리 미군 장성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게 그 현실이다. 분단체제를 만들었고 분단체제를 지속시키려는 미국의 전쟁세력들이 만들어 내놓는 현실이다. 국회의원 안상수는 이산가족상봉사업을 포함하는 남북 간 전반의 대화와 협상이 여적죄(적국과 합세하여 대한민국에 대항한 죄. 형법에서 최저형이 사형)가 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힌다. 분단이 만들어지는 데에 기여하면서 분단을 이용해 살고 있는 한국사회의 분단적폐세력들이 만들어내는 현실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것이야 중요치 않다. 대한민국의 그 누구도 이 현실에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또 다른 현실은 분단체제가 그 막바지를 향해 줄달음 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4월 27일 판문점선언이 나오고 세기적인 6.12북미공동성명이 나오고 이어 9월 평양공동선언까지 나왔다. 그 누구도 더는 되돌릴 수 없을 터. 불가역적이다. 특히, 9월평양공동선언은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을 추동해가는 가운데 판문점선언을 이행해 남북관계 발전을 가속화하며 민족의 화해 단합과 평화번영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어나가는 데서 세워낸 통일의 이정표다.
분단체제를 불편해 하며 분단체제를 극복하려는 사람들은 촛불들과 함께 역사의 복판으로 성큼 들어서 있다. ‘분단체제’를 끝내고 ‘평화’를 매개로 ‘연방체제’로 나아가는 길을 내고 있는 중이다.
영화 ‘바다로 가자’는 명료하다. 바다로 가자고 한다. 실향민들이 그리고 실향민 2세들과 실향민 3세들이 주문하고 있는 대로 바다로 가면 된다. 바다로 가, ‘바다로 가자’라는 노래를 부르면 되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6만 실향민들의 그 아픔을 함께하고 소통하며 그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이다. 그 길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통일의 수평선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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