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욱 칼럼>이승복 논란과 울진.삼척 사건의 진상 ②
1968년 의문의 북파공작부대
그러면 왜 ‘북괴 무장공비(?)’라고 칭하는 자들을 무려 120명씩이나 풀어 넣고 대대적인 ‘북괴의 남침 작전’을 벌인 이유는 무엇일까? 또 그렇게 수상한 작전에 동원돼 무차별 살상을 당한 자들이 ‘북괴 무장공비’가 아니라면 그들은 누구일까? 이런 의문을 풀 열쇠는 1968년 중앙정보부와 각 군이 경쟁적으로 북파공작원들을 양성, 양산했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그들이 무장공비가 아니라 무장공비의 침투를 가장한 군사작전이었다면, 그 작전에 투입한 이들은 북파공작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1967년과 1968년은 가히 ‘북파공작의 전성시대’였다. 1967년 10월에는 이진삼(李珍三) 609부대장(훗날 육참총장. 자유선진당 의원)이 두 번이나 38선을 넘어가 인민군 병사 33명을 살해하는 전과(?)를 올렸고, 이듬해인 1968년에는 실미도(684부대) 부대를 비롯한 수많은 북파공작부대가 창설됐다.(※이 실미도부대 창설 및 그 이유로 알려진 소위 1.21 청와대 기습 미수 사건(일명 김신조 사건)은 별도로 다뤄야 한다.)
본고 논제인 삼척·울진 작전과 관련해 관심을 끄는 북파공작 부대가 있다. 해병북파공작부대(MIU)가 그것이다. MIU는 Mission Impossible Unit 또는 Marine Intelligence Unit의 약자라 한다.
( 1960년대 북파공작원 훈련 모습. 정확히 몇 년도 사진인지는 알 수 없다.)
1968년 3월 중앙정보부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아 창설된 MIU는 한 달 뒤인 1968년 4월 강화도 불온면 까치골로 옮기면서 ‘까치부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흔히들 이 부대를 가리켜 “육.해.공 어느 곳을 막론하고 즉각 침투해 임무를 완수하는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대한민국 최고의 전천후 부대”라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것을 전제로 부대원을 양성했다는 말이다.
MIU 창설 시기를 1968년 11월 또는 12월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아래 인용문은 다음 블로그 글 <해병북파공작대 MIU>(2010.8.14.)와 <마니산 까치부대 MIU>(2013.1.22.)에서 옮겨왔다.
[인용] 1968년 11월 중앙정보부는 최초 장기하사관 11명과 사병 2명을 차출해 마니산 서쪽 정수사 아래 텐트를 치고 합숙훈련을 시작하면서 MIU 부대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2년 후 하사관 15명과 사병 15명을 선발해 2진으로 투입시켰으며 현재까지 밝혀진 총인원은 l장교(공작관) 13명, 요원 158명이며, 현재 연락이 가능한 요원은 공작관 5명, 요원 114명이다.[인용]
MIU 창설 시기가 1968년 3월인지 11월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중앙정보부의 명령으로 3월 부대가 창설돼 11월 본격적으로 활동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볼만한 이유가 있다. 1968년 9월 육군 보안사령부와 해·공군 보안부대가 재편된 것이 그것이다.
육군보안사 창설은 대통령령 제 3593호 및 국일명(육) 제48호에 따른 조치로, 대통령 비서실의 요청으로 총무처 법무담당관에 의해 관보 제5056호(1968.9.23)에 실렸다. 박정희 정권이 1.21 사건을 북한 특수부대의 습격이라고 정의한 뒤 짐짓 주체할 수 없는 복수심을 폭발시킬 듯한 분위기가 연출되던 때였다.
1968년 9월 육군보안사령부 창설
1.21 사건 이틀 뒤인 1월 23일 미 최신예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나포되자 박정희 정권은 잘됐다 싶어 한국과 미국이 함께 북한을 보복 응징하자며 미국을 졸라댔다. 상국(上國)이 계속 반대하자 박정희 정권은 남한 단독으로라도 북한을 응징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육군 보안사령부를 만든 것이고, 이처럼 은밀하게 육군 보안사령부가 생긴 지 한 달여 만인 10월 말부터 울진과 삼척에 120명의 ‘북괴 공비’(?)처럼 보이는 이들이 떼로 출현한 것이다.
육군보안사령부의 전신인 육군방첩대는 1.21 청와대 기습 사건을 ‘진압’(?)했고, 육군보안사령부로 승격된 뒤에는 울진·삼척 사건 ‘진압을 지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1948년 5월 27일 육군정보국 정보처 내에 설립된 특별조사과가 모체이다. 1948년 11월 특별조사대, 1949년 10월 육군본부 정보국 방첩대로 개편하면서, 방첩교육을 마친 장교 및 간부 33명을 배치.. 1950년 10월 육군본부 직할 특무부대로 독립하고, 1960년 7월 육군방첩부대로 개칭하면서 간첩 검거와 베트남 파병, 1.21 사태 진압에 나섰다. 1968년 9월 육군보안사령부로 개칭해 보안 지원 업무와 대공활동을 강화하고, 울진·삼척 사태 진압을 지원하였다. 1977년 9월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로 통합되고, 1991년 1월 국군기무사령부로 개칭하였다.』 (다음카페 제너럴 헤드쿼터스 http://www.cafe.daum. net/beauty82) |
육군 보안사령부가 1.21 사건을 진압하고 울진·삼척 사태 진압을 지원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두 사건은 분명히 육군방첩대 및 그 후신인 육군보안사령부와 연관돼 있다. 육군방첩대는 1968년 육군보안사령부로 격상된 이후 보안사령부를 거쳐 기무사령부 시기까지, 수많은 간첩(단) 사건을 조작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이 조직은 이 반도 남녘을 짓누르는 분단체제의 토대이고, 국가 그 자체라고도 볼 수 있다. 미국은 바로 이 흉악한 조직을 통해 이 땅 남녘에 부도덕하고 잔인무도한 군사정권을 연거푸 세웠다. 이 조직이 없었다면 1.21 사건과 울진.삼척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앞서 살펴봤듯이, 울진·삼척 사건 진압을 총괄한 것은 대간첩대책본부로 돼 있다. 대간책본부장인 유근창 중장은 이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여러 차례 기자회견을 열어 몇 명을 죽였고, 몇 명이 남았는지를 발표했다.
그런데 대간첩대책본부는 언론에 관련 정보를 제공할 때도 사건 발생 후 며칠이 지나서야 발표했고, 이미 현지에서 보고된 사항이라도 언론사에 ‘보안’을 이유로 보도를 통제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육군 보안사령부가 대간첩대책본부 뒤에서 이 사건의 전개 과정을 조종한 것이 아닐까?
앞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건 당시 제1야전군 작전참모였던 이재전 씨는 “부대를 장기판 주무르듯이 무계획적으로 기동”시켰다며 부대 편제를 유지하지 못한 상태로 우왕좌왕하며 작전을 전개한 결과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실토했다. 군 부대를 제 멋대로 주무를 수 있는 상위 조직이 “부대를 장기판 주무르듯이 무계획적으로 기동”시킴으로써, 작전에 임하는 부대 지휘관들이 부대 편제도 못 갖춘 채 이 부대 저 부대에서 마구잡이로 차출한 병사들을 이끌고 우왕좌왕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대간첩대책본부는 언론플레이용이었고, 야전부대는 우왕좌왕하며 군사작전을 벌이는 것처럼 뛰어다니는 역할을 맡았을 뿐이며, 모든 작전은 육군보안사가 야전군을 따돌린 채 은밀하게 진행한 것이 아닐까? 매우 수상한 경위로 체포 또는 자수했다는 자들이 기자회견을 연 장소가 중앙정보부였다는 사실도 이런 의심으로 이어진다.
사라진 무기수. 사형수들
1968년 울진·삼척 사건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부대가 또 하나 있다. 인천에서 가까운 선갑도에 있었던 북파공작부대인 선갑도부대. 6·25 전쟁 때는 이 섬에는 미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로 알려진 첩보부대 ‘8240부대’가 주둔했었다.
영화 <실미도>로 잘 알려진 공군의 ‘실미도 부대’와 해병대에 설치됐던 MIU처럼, 육군도 똑같은 목적으로, 경쟁적으로 대북 특수공작부대를 만들었고 그 부대가 바로 ‘선갑도 부대’였다. 선갑도부대 창설 당시 명칭은 육군첩보부대(AIU) 산하 902정보부대 803지대였다.
이 부대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것은 이 부대를 만드는데 관여한 이들의 증언을 통해서였다. 북파공작 장교 모임인 ‘진백회’(眞白會) 회장 김원한(金元漢)씨와 이춘국(李春國) 씨 등이 그들이다. 먼저 이춘국 씨의 증언.
1968년에 창설됐어요. 창설 준비를 기획하고 있을 때 저는 월남에 파견 나가 있었는데, 부대장이 귀국하라고 해서 돌아왔어요. 부대장한테 귀국 신고한 직후부터 특수공작부대 창설을 제가 실무적으로 지휘했어요. 전략목표·전술목표·훈련계획 등을 정하고 현장 지도도 했죠. 선갑도 부대가 803대, 중앙물색조를 훈련시키는 809대, 설악개발단 909대가 그때 창설됐죠. …… 실미도 부대는 민간인들을 선발했고, 우리 선갑도 부대가 무기수와 사형수들을 선발했죠. 32명이었어요.(『월간조선』2007년 6월호 「HID 對北(대북) 작전 秘史(비사)」) |
선갑도 부대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1968년 당시 중앙정보부 관계자가 안양교도소를 방문해 재소자들과 개별 면담을 거친 뒤 특수부대 입영을 권했다 한다. 1964년 군 복무 중 살인을 저질러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5년형으로 감형돼 안양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김구식(64.가명) 씨도 그렇게 차출됐다.
당시 신분을 밝히지 않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교도소에서 이뤄진 개별면담에서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한다는 것은 별 것 아니다. 명령에 복종하며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우리를 안심시켰습니다. 별것도 아닌 일에 엄청난 돈을 준다고 하니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3천만 원이라는 돈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었습니다. 입을 하나라도 줄이려고 자식들을 남의 집에 머슴으로, 식모로 보내던 시절 아니었습니까?
살인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이광출(62.가명) 씨는 당시 면접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머리 짧고 양복 입은 사람이 마주 앉더니, ‘건강하냐’ ‘일어나 봐라’ ‘제자리에서 뛰어 봐라’고 했어요. 약식 신체검사를 한 거죠. 그리고 나서 한 달 후 그 사람이 트럭을 몰고 와 올라타라고 했습니다. 트럭은 곧장 인천으로 출발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68년 7월 5일 안양교도소에서 12명의 기결수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 선갑도 부대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1968년부터 1970년까지 위와 같은 선발 과정을 거쳐 모두 40명의 기결수가 선갑도 부대로 향했으며, 이들 중 무기수 10명도 포함돼 있었다 한다. 이렇게 무기수 또는 사형수들이 사라진 곳은 안양교도소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또 실미도 부대(684부대)원들 중 7명이 1968년 충북 옥천의 한 마을에서 동시에 잠적한 청년들이었다는 사실이 2004년 밝혀지기도 했다. 왜 이처럼, 1968년 당시 북파공작원들을 ‘납치’ 또는 ‘신병 탈취’ 형식으로 끌어 모았을까?
신원을 감추기 위해서!
흔히들 이렇게 생각한다.
북파공작원을 보내는 것은 정전협정을 위반하는 것이니, 이들은 계급도 없고 부대 이름도 없는 투명인간들이어야 한다고… 거짓말이다.
1940년대 말 미 군정 시절은 물론 6.25 전쟁 시기에도 수없이 많은 이들이 북파됐다 체포됐지만, 미국과 남한은 이들의 신원을 확인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우린 보내지 않았다’고 발뺌하면 그만이다.
( MIU 부대원들이 진흙을 뒤집어 쓴 채 사진을 찍었다. 네이버 블로그 ‘MIU 해병북파공작대 일명 까치부대’.)
북파공작 부대를 운영하기 위해 가족들도 모르게 시골 마을 청년들을 집단으로 꾀어가거나, 무기수 또는 사형수들을 교도소에서 몰래 빼내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신분 말소’를 위해서다. 이 세상에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북파공작이든 뭐든 이들이 사망했을 때 가족들에게 ‘전사’ 통지서조차 쓸 필요 없는 존재로 만든 것이다. 이들은 북파공작요원으로 차출되는 순간 이미 ‘사망 처리’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들이 울진.삼척 사건 등에서 ‘북한 공비’로 처리된 것은 아닐까?
인민군 대역으로서의 북파공작원
북파공작원 출신 주진하 씨는 월간『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1968년 7월 북파공작원으로 포섭돼 강원도 산악 지역에서 인민군들이 사용하는 AK 소총으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청량리역에 가서 중앙선 열차를 탔는데 …… 강릉에 도착해 트럭 타고 대여섯 시간 가니까 강원도 고성군 OO리 …… 25일 동안 일반부대 훈련소에서 하는 제식훈련부터 사격, 수류탄 투척 등의 교육 …… 그리고 고성군 모 지역으로 올라갔어. 거기가 육군 첩보공작조 훈련소야. 거기는 우리 선배인 도깨비부대와 번개부대가 있었어. 두 부대는 한 부대에 인원이 100명 정도씩 있었어. 우리는 박쥐부대로, 우리 밑에가 땃벌. 이렇게 4개 부대가 …… 산악훈련, 독도법, 사격 등을 배워. 사격도 AK사격이야. 국산권총은 만져보지도 못했어요. 그리고 봉술, 태권도, 호신술, 특공무술, 해검[건]법(열쇠 따는 것), 통신 모스 부호, ... (『신동아』「죽음을 넘나는 북파(北派) 공작원 ‘30년 묻어둔 비사’」1996년) |
다른 이의 증언.
현지화 훈련도 필수적이었다. 특수부대원들은 북한군과 똑같이 아침에 눈을 뜨면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쳐야 했고, 북한 담배를 피우고 북한 말씨를 써야 했으며, 북한 군복을 입고 북한 소총으로 사격을 해야 했다. 평양에 진입했다가 검문을 받거나 붙잡혔을 경우를 대비해 시내 지리를 외워야 했고, ..(『주간조선』 2100호 「"軍, 아웅산테러 보복작전 세웠다"」2010년 4월 7일) |
(북파공작원들이 특공무술을 훈련하는 장면. 벽에는 인공기가 걸려 있다. / 사진 출처 중앙일보)
21살 때인 1973년 북파공작원이 됐고 3년 뒤인 1976년 제대했다는 윤경철 특수임무수행자회 중구지회 사무국장의 증언이다.
외출, 외박, 휴가가 전혀 없었다. 1년 6개월 이상은 인민군복을 입고 생활했고, 훈련도 인민군 특수부대 식으로 받았다. 사람이 견딜 수 있는 한계에 달하는 만큼의 훈련을 받았다. 그 안에서 훈련을 받다 죽은 사람도, 다친 사람도 많았다. |
이들의 훈련 목적이 ‘북파’ 즉, 38선 이북에 침투해 이런 저런 일들을 벌이는 것이지만, 이들은 언제든 ‘인민군 대용품’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이들을 가리켜 ‘인간 돼지’라고 불렀다는 증언이 이어지고 있다. 평소 잘 먹여 살을 찌운 뒤 잡아먹는 돼지처럼, 소모품으로 쓰고 버릴 존재로 길러진다는 말이다. 2000년에는 <돼지들 - 북파 무장공작원의 최후>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됐고, 북파공작원 단체에서 이 책을 원작으로 하는 같은 이름의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한다. 또 2003년 영화 <실미도>가 나온 뒤에는 이 영화를 본 북파공작원 출신들이 자신들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며 스스로 돼지였다고 회고했다.
[실미도 영화와 달리] 실제로는 영외에 나갈 수가 없었다. 그 대신 부대에서 3개월에 한 번씩 여자와 두 시간 동안 지낼 수 있도록 해 줬다. 성문제는 그렇게 해결했다. 1주일에 소 한 마리씩 잡아줄 만큼 먹을 것은 푸짐했다. 술은 매주 토요일 밤에 막걸리가 세 잔씩 나왔다. 이들은 ‘돼지’라고 불리며 혹독한 생활을 했다.(다음 카페 73자유지대 <북파공작원 한 맺힌 증언 ‘우리는 돼지였다’> http://cafe.daum.net/73FREEZONE) |
민사심리 북파공작의 비밀
그렇게 ‘돼지’처럼 키워진 이들이 한 일은 38선을 넘어가 인민군을 살상하는 일이 전부였을까? 아니었다. 이들은 소위 내수공작이라는 국내 정치인.언론인 테러에도 동원됐다(이에 대해서는 ‘진실의 길’ 기무사 관련 기고문 참조). 이처럼 인민군이나 정치인 또는 언론인을 살상하는 것 외에 북파공작원들이 하는 일이 또 하나 있었다. 앞서 언급한 주진하 씨의 증언.
봉술, 태권도, 호신술, 특공무술, 해검[건]법(열쇠 따는 것), 통신 모스 부호, 민사심리(유사시에 적지에 들어가 그 지역 인민들을 동조하게끔 하는 전술), …… 절취는 시내로 교육을 나가지. 내가 68년 7월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우리 선배들은 68년 3월부터 들어와 있었어. …… 3월 4월에 들어온 도깨비부대 1기, 5월 6월 들어온 게 번개부대, 7월 8월에 우리 박쥐부대고, 우리 뒤로 땃벌이 ……(『신동아』「죽음을 넘나는 북파(北派) 공작원 ‘30년 묻어둔 비사’」1996년) |
민.사.심.리. !!
“유사시에 적지에 들어가 그 지역 인민들을 동조하게끔 하는 전술”
북파공작원들에게 왜 민사심리 전술을 가르칠까? 북파공작원들이 적지인 북한에 들어가 그곳 인민들을 상대로 남한에 동조하게 만드는 공작을 벌이기 위해서? 북파공작원들이 북한에 들어가 북한 주민들을 모아 놓고, 남한에 동조하라는 심리전을 벌인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이런 대북 민사심리 공작이 실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68년 말 울진.삼척에서 벌어진 해괴하고 끔찍한 사건은 바로 그 해 북파공작원들이 훈련 중에 받은 ‘민사심리’ 바로 그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1967년 내내 ‘1968년 북한 유격대의 대량 남침’을 호언했고, 대량으로 북파공작원들을 양성하며 민사심리 교육을 시켰다. 그리고 몇 달 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장대가 떼로 몰려와 강원도 평창 산간 마을 주민들을 모아 놓고 ‘민사심리’ 공작을 벌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 ‘이승복 어린이 사건’이 일어났다.
( 북괴 무장공비의 민사심리 작전을 묘사한 그림. 이승복박물관.)
육군보안사는 대한민국 간첩조작의 역사
앞에서 1968년 10월 육군방첩대가 육군보안사령부로 개편됐고, 이 보안사가 1.21 사건과 울진.삼척 사건 진압에 관여했다는 기록을 살펴봤다. 그러면서 방첩대와 보안사가 이 땅 남녘의 흑역사의 숙주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저들이 저지른 간첩(단) 조작 사건 등 국가조작사건은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육군보안사는 울진·삼척 사건 이듬해인 1969년부터 사소한 혐의로 국내외 인사들을 끌어다 모진 고문을 통해 허위 자백을 받아내는 수법으로 ‘가짜 간첩’을 양산했다.
1969년 2월 ‘동해안 지구 고정간첩단’, 6개월 뒤인 8월에는 ‘문산-서천 무장간첩 6명 생포’, 10월 ‘고정간첩 9명 검거’, 1970년 5월 ‘안면도 공작선 격침’, 1971년 4월 ‘북괴 간첩단 4개망(網) 51명 일망타진’, 같은 달인 4월 ‘재일교포 대학생 넷 포함, 간첩 10명 검거’(일명 학원(學園)간첩단 사건), 9월에는 ‘7개 조직 간첩단 17명 검거’, 11월 ‘일본 민단(民團) 간첩단 81명 검거’, 1972년 1월 ‘7개 간첩망 23명 검거’, 3월 ‘고정간첩 12명 검거’, 1973년 6월에는 ‘산업스파이 간첩단’ 사건, 9월 ‘4개망 간첩 11명 검거’, 1974년 11월 ‘일본 거점 간첩단 8명 검거’ 등등 .. 이 사건들 가운데 정말 저들이 말하는 ‘간첩’을 검거한 경우가 있기는 있었을까?
1968년 납북됐다 귀환한 뒤 간첩으로 몰린 대양호 선원 김 모 씨 등 사건 피해자 유족 33명이 46년만인 2016년 5월 국가로부터 총 44억여 원의 손해배상금을 받은 일도 있다. 대양호는 1968년 동해에서 고기를 잡다 북한 경비정에 나포돼 202일간 북한에 머물다 이듬해인 1969년 5월 귀환했다.
당시 육군보안사령부 308 보안부대 수사관들은 이들이 북한에서 지령을 받고 내려와 간첩 행위를 했다며 지하벙커로 데려가 온갖 고문을 가해 간첩으로 만들었다. 보안사 수사관들은 심지어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피해자들을 고문했고, 자녀들에게도 전기고문을 하겠다고 협박해 거짓 진술을 받아낸 것으로 밝혀졌다.
육군보안사만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중앙정보부와 경찰, 군대 할 것 없이 모든 권력기관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며 박정희 정권과 미국에게 충성했다. 특히 김형욱의 중앙정보부는 1968년 내내 동백림사건과 통혁당사건,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 등등 거창한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며 이 땅 남녘의 역사에 똥물을 끼얹었다. 이처럼 국가조작의 흑역사가 가장 처절하고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전개되던 1968년 일어난 (1.21 사건과) 울진.삼척 사건은 그 흑역사의 한 페이지였을까, 아닐까? (③에서 계속)
2018-12-12
- <1983 버마> 저자 강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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